생애

돋보기

성천 류달영의 삶은 시대의 요청에 항상 최선의 실천으로 응답했습니다.


연구 · 저술 · 교육 · 사회운동 등을 통해 뭇 생명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고 국가와 사회의 건강한 발전과 진보를 꿈꿨습니다.

시대에 따른 성천의 응답

일제통치 시기
  • 9세 때 한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3.1 독립만세운동 참여
  • 양정고보 시절 방학 때 고향에서 ‘브 나로드(농촌 속으로)’ 운동 참여
  • 전 국민 90% 이상인 농민을 위한 삶을 살고자 수원고농으로 진학(농민운동의 초석이 됨)
  • 개성 호수돈여고 교사가 되어 여성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어머니의 정신이 국가의 기초란 신념)
  • 스승 김교신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얼에 따른 기독교 사상의 정립과 실천 노력
  • ‘수요회’를 만들어 인간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으로 동지 키움(성천아카데미의 초석이 됨)
  • 농촌운동가 최용신의 전기 『최용신 소전』 집필, 출판
  • <성서조선> 사건 및 『최용신 소전』 집필로 인해 옥고(훗날 애국지사로 추서됨)
광복 후
  • 자신에게 맡겨진 남궁억의 유고 중 선열들의 독립투쟁 기록 부분을 자비로 복사해 『조선최근사』라는 제목을 붙여 각 학교와 유지들에게 분배하여 역사의식 고취
  • 일제가 해산한 조선 보이스카우트를 부활시켜 금강소년척후대 조직해 인재교육
  • 광복 후 행정과 치안이 공백 상태일 때 개성시 자치위원으로 선출되어 혼란 막음
  • 개성중학 교사로 과학과 한국사 가르치며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 심어줌
  • 수원고농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학제개편 되어 서울대 농대 교수로 발령받아 강의. 최초 원예학과 개설
한국동란 시기
  •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됐으나 일반인은 서울 복귀가 어려워 수원의 농대 캠퍼스에서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연합 수업을 실시한 가운데 ‘덴마크 부흥사’ 강의(『새 역사를 위하여』 집필의 기초가 됨)
  • 1.4 후퇴로 대구 피난지에서 전쟁으로 낙담한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새 역사를 위하여』 집필
    (훗날 국무총리급인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으로서 새마을운동을 지휘하게 된 시발점이 됨)
전후복구 시기
  •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기회가 주어지며,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값진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저서와 강의를 통해 설파
  • 『새 역사를 위하여』가 판을 거듭하여 거액의 인세로 평화농장 부지 구입해 스스로 농부가 됨
    (훗날 농민운동의 실천적 모범이 되고, 국민교육과 계몽을 위한 성천문화재단 설립의 기본 재원이 됨)
  •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대학 재건 계획의 일환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 교환교수로 초빙됨
  • 코넬대학으로 옮겨 난초학을 연구하고 귀국길에 관련 종자와 문헌 자료 제공 받아 가져옴
    (훗날 한국 잔디의 종자 발아 연구에 성공을 거둬 한국 잔디의 해외수출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됨)
  • 미국 정부 초청으로 받은 미국행 1등석 항공표를 세계일주 3등표로 바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 유럽 일주를 통해 선진국가들을 시찰하고 발전상을 경험
군사혁명 정부 시기
  • 군사혁명 정부가 낙후된 조국을 일으키기 위해 조직한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총리급) 위촉에 거절을 거듭하다가 조국을 ‘동양의 덴마크’로 부흥시키고자 조건부 수락. 국민운동의 목적은 하루속히 군정을 끝내는 것이라 천명하고 취임(1961년)
  • 재건국민운동본부는 형식적으로 정부기구이지만 민간에서 존경받는 10명의 인사를 초빙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여 모든 결정은 중앙위원회 의결을 거친 후 집행하고, 전국의 재건 청년회와 재건부녀회, 촉진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민간이 국민운동의 동력주체가 됨
  • 사업의 승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신념과 능력에 달려있다는 소신으로 가장 먼저 교육사업을 통한 거국적인 국민의식교육을 실시하고, 이후 여러 단체를 조직해 사회사업에 매진
  • 남북관계에 있어서 소모적인 이념대결 대신 국가재건을 통한 생산적 경쟁 추진
  • 혁명정부에 민심을 전하고 혁명정부와 지성계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여 충돌 완화
  • 혁명정부에게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라 촉구하는 <혁명정부에 부치는 직언>을 발표하고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사퇴(1963년)
  • 혁명정부가 재건국민운동본부 조직을 새로 창당하는 공화당 조직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해산했음에도 국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민간주도로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발족하여 초대회장으로 취임(1964년)
  •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재건학교’를 창립해 중학교 과정 교육을 실시하고, 영농자금을 필요로 하는 젊은 농민들을 위하여 천주교의 ‘신용금고’를 발전시켜 ‘마을금고’로 명명해 운영(훗날 ‘새마을금고’로 발전)
  • 끝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군사혁명 정부를 비판하는 글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을 발표(1965년)
  • 류달영이 추진한 국민운동은 이후, 혁명정부가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켜 농촌운동의 세계적 모델이 됨
  • 평화농장의 농부로서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겸직하다가 본부장 사퇴 후에는 농부와 교수로서의 직무에 더욱 충실(무궁화연구회 창립 등 겨레의 상징인 무궁화에 대한 연구와 저술, 품종 개발에 주력)
국가발전 시기
  • ‘농민의 정신혁명, 농업의 기술혁명, 농촌의 생활혁명을 성취해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로 설립된 ‘전국농업기술자 협회’의 2대 총재 취임(1972년)해 모금을 통해 농업진흥관 건립하고 농민대학을 설치해 중견 농민들에게 농업의 최신기술 교육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성심을 다해 생명을 가꾸는 것이 농업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농부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농심철학 전파)
  • 식량증산을 위해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는 농약과 화학비료의 폐단에 맞서 ‘한국유기농업협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시대를 선도해 유기농업 운동
  • ‘한국농산물유통연구회’(훗날 <한국농어민신문>으로 발전해 농산물의 유통 정보 공유)를 만들어 농산물 유통 등 농업경제 및 유통교육 실시
  • 서울대학교 교수협회회장, 퇴임 후엔 명예교수, 국민윤리학회 회장, 대한가족계획협회 회장,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한국덴마크협회 회장, 카운슬러협회 회장, 4H운동 회장, 건전생활중앙협의회 회장, 한국원예협회 회장, 인간교육원 회장,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 이사장, 세종기념사업회 부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대한적십자 서울지사 상임위원(1967년), 본사 중앙위원(1980년), 사회교육 심의위원, 한국잡지윤리위원회 위원, 국제가족계획협회연맹 이사, 국토통일원 고문, 헌법개정심의위원(1980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1982년), 대한적십자 봉사회 중앙협의회 초대회장, 적십자간호대학 학교법인 이사 등의 일을 맡아 국내외에서 초인적인 활동
  •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각종 협회를 창설하고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사회의 균형발전을 추구했고 농업, 교육 분야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이끌어 냄
3차 산업혁명(정보화 혁명) 시기
  • 농촌인구를 능가하게 된 도시민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평생교육사업을 위해 성천문화재단 창립. 장차 한국인들에게 건전한 정신문화와 건실한 생활문화를 심어주기 위해 인류 성현들의 정신유산인 인문고전을 교육하는 생활문화아카데미를 부설(인류 문화의 꽃인 고전을 정성껏 배운 후에는, 각자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문화로 승화시키자는 뜻)
  • 미래지향문화강좌, 현대생활문화강좌, 우리문화밝힘강좌로 확장 개설하고 출판부에서는 각종 단행본 출판했으며 고전교육의 현장을 답사하는 해외강좌여행 실시
  •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신기원을 연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선양하는 다석사상연구회 후원
  • 비무장지대 생태계학술조사 실시
  • 생을 마칠 때까지 마지막 필생의 사업으로 성천문화재단 이사장 겸 아카데미 원장으로 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