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 류시화 옮김, 연금술사 펴냄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 류시화 옮김, 연금술사 펴냄

환상의 자아

– 인간에게 상속된 기능장애 –

에크하르트 톨레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과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교사이다. 독일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영국 런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극심한 우울증으로 보낸 사춘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원 재학 중 내적변혁을 경험한다. 이후 그는 ‘깊은 환희 상태’로 방황하다가 우연한 모임을 통해 오늘날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되었다.그는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라 진단한다. 이로부터 톨레는 저서와 강연을 통해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단순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인 『A New Earth』는 전작인 『The Power of Now』와 함께 장기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저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 책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통찰한 나’를 통해 확인해 보자.

환상의 자아

‘나’라는 단어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장 심각한 오류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심오한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쓰임새에서 이 단어는, 파생어인 ‘나를’, ‘나에게’, ‘나의’, ‘나의 것’, ‘나 자신’ 등을 포함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보통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나’에는 원천적인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것이 에고이다.

시간과 공간의 실체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이 환상의 자아의식[외부세계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기에 대한 느낌]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그 환상의 자아가 그 후의 모든 해석의 토대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오해의 토대가 되고, 모든 사고 과정, 상호작용, 관계의 근본이 된다. 당신의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 환상은 환상이라고 알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환상의 알아차림은 환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것을 실체로 오해하고 있는 동안만 환상은 생존한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의 실체가 저절로 나타난다. (중략) 그렇다면 이 환상의 자아는 무엇인가?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 보통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괴물과도 같은 환원주의[어떤 실체는 그보다 더 간단한 기본적인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전제하고, 전자에 관한 설명을 좀 더 기본적인 후자의 설명으로 대치하려는 사고의 형태]적 행동에 의해, 무한한 깊이를 가진 당신이라는 존재가 성대에 의해 생성되는 소리나 마음속에 있는 ‘나’라는 생각, 혹은 그 ‘나’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모든 것들과혼동된다. 그렇다면 보통 말하는 ‘나’,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나를’, ‘나에게’, ‘나의’, ‘나의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부모의 성대가 만들어 내는 일련의 소리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단어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되고, 아이는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어떤 아이는 “쟈니는 배고파요.”라고 말하듯이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한다. 머지않아 아이는 ‘나’라는 마법의 단어를 배우고,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이름과 똑같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다른 생각들이 이 ‘나’라는 생각과 합쳐진다. 그다음 단계는 ‘나’의 일부로 보이는 것을 지칭하는 ‘나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바깥의 물건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일이다. 즉 물건에, 엄밀히 말하면 물건에 해당하는 자신의 생각에 자아의식의 옷을 입힘으로써 물건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나의’ 장난감이 부서지거나 빼앗기면 강렬한 고통이 일어난다.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장난감 자체가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니다. 아이는 어쨌든 곧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고 다른 장난감과 물건으로 관심이 옮겨 갈 것이다. 아이의 고통의 ‘나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온다. 장난감은 아이의 발달하는 자아의식, 즉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나’라는 생각은 다른 생각들을 그것에 끌어당긴다. 성별, 소유물, 감각을 가진 육체, 국적, 인종, 종교, 직업 등에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그 밖에 ‘나’가 동일화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등의 역할, 축적된 지식이나 의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과거에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기억은 ‘나와 나의 이야기’로서 나의 자아의식을 다시 한 번 규정해 준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는 수많은 것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국 내가 자아의식을 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정하게 붙들고 있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 ‘나’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은 이 정신적 구조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나’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대개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그 구조물의 일부, 즉 에고의 지배를 받는 자아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지만, 그때 그것은 당신 안의 훨씬 깊은 곳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끊임없는 마음의 흐름을, 대부분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강박적인 생각들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한다. 이 사고 과정과 그것에 뒤따르는 감정으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다. 영적으로 무의식적이라는 의미가 이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시도 멈추지 않고 떠드는 목소리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목소리?” 하고 되묻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화를 내며 부정한다. 물론 되묻거나 화내는 주체는 바로 그 목소리, 그 생각하는 자, 관찰되지 않는 마음이다. 그것이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어서 거의 독립된 실체처럼 보인다.

생각과의 동일화에서 벗어나, 한순간이라도 자기 마음의 내용물로부터 그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의 존재로 정체성 전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은 그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정체성의 이동이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이유도 모르는 채 그저 기쁨과 내적 평화가 밀려온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 (중략) (54~58쪽)

에고의 내용물과 구조

에고의 지배를 받는 마음은 과거에 의해 완전히 조건 지어져 있다. 그 조건 지어짐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물과 구조가 그것이다. 장난감을 빼앗겨 심한 고통 속에서 우는 아이의 경우 이 장난감은 내용물에 해당한다. 그것은 다른 장난감이나 물건 같은 또 다른 내용물로 대체가 가능하다. 당신이 자신과 동일화하는 내용물은 주위 환경, 성장 배경, 그리고 둘러싼 문화에 따라 조건 지어진다. 아이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그 장난감이 나무로 만든 동물 같은 것이든 정밀한 전자 제품이든, 잃어버렸을 때 오는 고통의 차이가 없다. 왜 그런 극심한 고통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나의’라는 단어에 숨어 있으며,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대상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은 에고의 지배를 받는 마음의 구조에 단단히 박혀 있다.

에고가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 구조들 중 하나가 동일화이다. ‘동일화(identification)’라는 단어는 ‘같다’는 의미의 라틴어 ‘이뎀(idem)’과 ‘만들다’는 뜻의 ‘파케레(facere)’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내가 어떤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나는 그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 된다. 무엇과 같게 만드는가? 바로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게 나의 자아의식을 부여하고, 따라서 그것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정체성의 대상은 물질이다. 나의 장난감은 훗날 나의 자동차, 나의 집, 나의 옷 등이 된다. 나는 물건들 속에서 나 자신을 찾으려 하지만 결코 완전하게 성공하지 못하며, 결국 그것들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결과로 끝이 난다. 그것이 에고의 운명이다. (중략) (62~64쪽)

존재의 망각

에고는 언제나 형상과 동일화되고, 어떤 형상에서든 자기 자신을 찾으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형상은 물질과 육체만이 아니다. 물건이나 육체처럼 외부의 형상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의식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이다. 이것들은 에너지 형태를 띠고 있으며, 물질보다는 미세하고 밀도가 낮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형태이다. 머릿속에서 절대로 말을 멈추지 않는 목소리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것은 사실 그칠 줄 모르는 강박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모든 생각이 당신의 관심을 온통 흡수해 버리고, 머릿속 목소리와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 속에서 자기를 망각할 때, 당신은 형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에고의 움켜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에고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부여받아 반복해서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과 조건 지어진 정신적 감정적 패턴들의 복합체이다. 에고는 무형의 의식인 ‘나의 있음(I am)’ 즉 ‘순수한 있음(Being)’이 형상과 뒤섰일 때 생겨난다. 이것이 동일화의 의미이다. 이것이 존재의 망각이며, 근본적인 실수이고, 존재가 개별적인 형상들로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다. 이것이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 놓는다.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사르트르의 통찰까지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이 근본적인 오류를 근본적인 진리로 알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내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데카르트가 찾아낸 대답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 생각과존재를 동등시했다. 즉 정체성-‘나의 있음’-을 생각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는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는 대신 에고의 근원을 발견했지만,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 명제 속에는 데카르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다른 유명한 철학자가 깨닫기까지 그로부터 거의 3백 년이 걸렸다. 그의 이름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발언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그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식은 생각하고 있는 의식과 별개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 알아차림은 생각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의식이다. 그리고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알아차림이다. 만약 자신 안에 생각밖에 없다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자신이 꿈꾸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꿈꾸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꿈꾸고 있는 사람이 꿈속 이미지들과 동일화되듯이 모든 생각과 동일화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몽유병 환자처럼 살고 있으며, 오랜 기능장애의 마음 습관에 갇혀 똑같은 악몽 같은 현실을 언제나 계속해서 재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 꿈에서 깨어난다. 다른 차원의 의식이 들어온 것이다.

사르트르의 통찰은 깊이가 있었지만,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완전히 깨닫기에는 그 역시 자신의 생각과 너무 동일화되어 있었다. 그 중요성이란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떠오른 것이었다.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비극적인 상실을 겪고 그 결과 새로운 차원의 의식을 경험한다. 소유물 전부를 잃은 사람도 있고 자식과 배우자, 사회적 지위, 명성, 신체적 능력을 잃은 사람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무엇과 동일화되어 있었든, 무엇에 자아의식을 부여하고 있었든, 그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런 후에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처음에 느꼈던 고뇌와 극심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현존[이 순간에 존재함]’의 신성한 느낌, 깊은 평화와 평안, 두려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찾아온다. 사도 바울은 이 현상에 분명 친숙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신의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평화는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묻는다. 이런 일에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에고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깨닫게 되면 대답은 간단하다. 당신이 동일화되어 있는 형상, 당신에게 자아의식을 부여해 준 형상이 무너지거나 사라질 때 에고도 함께 붕괴된다.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이기 때문이다. 동일화될 대상이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 주위의 형상이 사라지거나 죽음이 다가올 때, 당신의 존재감, ‘나의 있음’의 느낌은 형상과의 얽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물질에 갇혀 있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형상을 초월함으로서, 만물에 편재한 ‘현존’으로서, 모든 형상과 모든 동일화 이전에 있는 ‘순수한 있음’으로서 자각하게 된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은 지금까지 의식이 동일화되어 온 그것들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평화이다. 당신 존재의 궁극적인 진리는 ‘나는 이것이다’ 또는 ‘나는 저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있다’이다.

큰 상실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이런 깨어남을 경험하고 형상과의 동일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즉시 자신이 상황과 타인과 불공평한 운명과 신의 피해자라는 강력한 정신적 이미지나 생각 형태를 만든다. 이러한 생각 형태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분노, 원한, 자기 연민 등의 감정들에 강하게 동일화되기 때문에, 이것이 상실을 통해 붕괴된 과거의 동일화 대상들의 자리를 금세 대체한다. 다시 말해, 에고는 재빨리 새로운 형상을 발견한다. 이 새로운 형상이 깊이 불행한 것이라는 사실은 에고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좋든 나쁘든 동일화만 될 수 있으면 된다. 사실 이 새로운 에고는 전의 것보다 더 폐쇄적이고 단단하며 더 뚫기 어렵다.

비극적인 상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항복한다. 억울해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는 사람도 있으며,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사랑이 더 커지는 사람도 있다. 항복은 있는 그대로를 내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삶을 향해 자신을 여는 것이다. 저항하면 내면이 움츠러들고 에고의 껍질이 단단해진다. 당신은 닫힌다. ‘부정적인 상태’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내적인 저항 상태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해도 더 많은 외부적 저항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 우주는 당신 편에 서지 않는다. 삶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셔터가 내려져 있으면 햇빛은 들어올 수 없다.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그때 만약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면, 당신의 행동은 전체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내적으로 열린 상태일 때 당신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인 지성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당신을 돕고 협조적이 된다. 불가사의한 우연들이 일어난다. 만약 어떤 행동도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은 저항의 포기와 함께 오는 평화와 내적 고요 속에서 휴식한다. 신 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다. (중략) (85~90쪽)

에고를 넘어-진정한 정체성

에고가 전쟁을 할 때,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에고는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 에고라는 환상은 자기야말로 당신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지켜보는 ‘현존’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에고가 생존하려고 싸우는 분위기에 있고, 과거로부터의 몇 가지 감정들이 되살아나 있는 상태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한번 그 감각을 맛보면, 이 순간에 머무는 ‘현존’의 힘이 강해지고 에고는 구속력을 상실할 것이다. 에고와 마음보다도 훨씬 큰 힘이 당신 삶에 생겨난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우리가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은 당신의 목적이기도 한데,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 존재함’만이 당신을 에고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당신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현재의 ‘지금’에만 존재할 수 있다. ‘현존’만이 당신 안의 과거를 해체시키고 당신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킨다.

영적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다. 출생증명서에 적혀 있는 것이 곧 자신이라고 믿는 생각보다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깝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의 생각임에는 변함이 없다. 영적인 깨달음은 내가 지각하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본 최최의 인간은 아마도 붓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는 아나타(무아) 였다. 또한 예수가 “너 자신을 부정하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해체하라는 의미였다. 만약 그 자신, 즉 에고가 진정한 나라면 그것을 ‘부정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환상의 나’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그 안에서 지각과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의 빛이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곳에 있는 나, 진정한 나, ‘순수한 있음’이다. 나 자신이 그것임을 알 때,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고, 단지 상대적인 중요성만을 지니게 된다. 그 일을 존중하기는 해도 절대적인 심각성과 중압감은 사라져 버린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 삶의 배후에 항상 있는 나의 본질적인 ‘순수 존재(Being)’, 그 ‘나의 있음(I Am)’을 감지할 수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있음이다(I Am that I Am)’를 감지할 수 있는가? 의식 그 자체로서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는가? 혹은, 일어나는 일들에 자신을 빼앗기고 마음속에, 세상 속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114~116쪽)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