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온생명』, 장회익 지음, 현암사 펴냄

『삶과 온생명』, 장회익 지음, 현암사 펴냄

새로운 생명 가치관의 모색

『삶과 온생명』은 물리학자인 장회익 교수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으로 시작한 탐색의 결과를 집약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생명과 인간, 과학과 문화를 아우르며 광대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현대과학 지식을 배경으로 주역과 성리학 등 우리의 전통 학문의 성격과 의미를 깊이 있게 살피고 생명·인간·문명을 현대과학의 눈을 통해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보다 근원적 생명체로서의 ‘온생명’ 개념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우리의 전통 학문이 전하는 ‘삶’의 지혜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지를 강구한다.

온생명과 인간의 위치

지구 상의 생명은 긴밀한 시공적 연계를 통해 구성되는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는 모든 개별 생명체들은 모두 이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는 부분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이 안에서 한시적인 생존을 유지해가는 의존적 존재들이다. 한편 이 모두를 포괄하는 정합적 체계로서의 전체 생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분명하고 특징적인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를 이 안에 포함되어 의존적 한시적 생존을 유지하는 개별 생명체들과 구분하여 ‘온생명’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태양과 지구 사이의 자유에너지 흐름을 모태로 대략 35억 년 전에 탄생했으며, 이후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이룩하면서 최근에는 ‘인간’과 같은 영특한 존재까지도 발생시켜 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게 하고 있다.

온생명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할 경우 기왕에 우리가 생명의 단위라 생각해온 개체적 생명체들이 지니는 생명은 ‘온생명’에 대해 ‘낱생명’이라고 불린다. 온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온생명의 여타 부분에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조건부적인 존재 단위들인 이들은 다른 한편에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생존을 지탱해 나가는 존재로 비교적 정확한 출생, 번식, 사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온생명은 그 구성에서 낱생명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낱생명과 함께 형성되고 이들의 연계와 함께 존속해 나가다가 이들의 소멸과 함께 소멸될 수 있는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낱생명을 위한 온생명의 중요성 못지않게 온생명 또한 낱생명들의 성공적 생존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게 된다.

생명이 지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특히 생명의 성격을 논의함에 있어서 온생명과 낱생명 사이의 관계는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하나의 낱생명을 기준으로 볼 때 그 낱생명의 생존은 온생명 안에서의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낱생명에 대해 ‘온생명에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이를 우리는 해당 낱생명에 대한 ‘보생명’이라 부른다.

이제 이러한 낱생명의 생존 양상을 살펴보면, 이들은 보생명과의 관계에서 개체 생존에 유리한 그 무엇을 얻어내어야 하는 동시에 이와의 원만한 공존 유지를 위한 생태적 배려도 함께해야 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이러한 성격은 긴 진화의 과정에 따라 이들의 본능 속에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모든 개체들은 그 본능적 행위 성향 속에 개체 보존을 중시하는 개체 중심적 성향과 함께 생태적 배려를 중시하는 생태 중심적 성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낱생명의 성공적 생존을 위해서는 일견 상충되는 듯한 이 두 성향의 균형과 조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점은 온생명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위치이다. 인간 역시 낱생명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보편적 생존 양상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나, 그 생태계적 위상에서 여타 생물종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최상위에 속하게 됨으로써 여타 생물종이 마련한 매우 특별한 형태의 자유에너지 공급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인간이 여타의 생물종보다도 더 깊고 광범위한 생태계적 의존성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며, 그 보생명과의 종적 그리고 횡적 관계가 그만큼 더 깊고 광범위하게 엮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광범위한 보생명 의존성은 이를 인지할 지적 능력의 요청으로 연결되며 이러한 지적 능력은 다시 그 생존 방식에서 더욱 광범위한 보생명에의 의존성으로 이끌어간다. 인간의 이러한 지적 능력은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여러 활동들을 가능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활동, 즉 정신문화를 이룰 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주변 생태계와의 종적, 횡적 관계로 대표되는 물질적·사회적 차원의 삶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삶, 즉 정신적 차원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생명의 전모, 즉 온생명을 파악하는 최초의 존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출현을 온생명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가 발생했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개개의 인간이 그 중추신경계를 이루는 신경세포들의 활동에 의해 몸 전체를 자신이라 여기는 하나의 의식 주체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집합적 의미의 인간은 다시 개개의 개체적 지능을 바탕으로 서로 사이의 관계를 정보적으로 연결하는 문화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렇게 이루어진 집합적 지성에 의해 자신을 포함한 전체 생명의 모습을 시간·공간적으로 꿰뚫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만일 문화 공동체를 통해 파악한 이 전체를 확대된 자아의 의식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는 인간이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고차적 의식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게 되며, 만일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그 어떤 집합적 지성이 형성된다면, 이는 곧 온생명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의식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경세포들의 집합적 작용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 마련되듯 인간의 집합적 활동에 의해 온생명의 의식이 마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온생명 안의 신경세포적 기능을 지닌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는 개체로서의 인간, 즉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이의 연장인 인류로, 그리고 종국에는 온생명에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 즉, 낱생명으로서의 자신과 한층 고차적 단위로서의 인류 그리고 전체 생명으로서의 온생명을 차례로 ‘나’라고 의식하는 다중적 주체가 되는 셈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인간과 신경세포 사이의 일정한 유사성과 함께 차이를 보게 된다. 인간이 자아를 의식하는 것이 신경세포들의 집합적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나 ‘신경세포들이 지니는 의식’의 집합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일 온생명의 자아를 인정한다면 이는 불가피하게 개별 인간들이 느끼는 의식 속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이 개별 주체의 자아와 달라지는 점은 집합적 의미의 인간 활동, 즉 인간의 문화를 매개로 하여 온생명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거침으로써 이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역시 개별 인간의 의식 작용이며, 이를 불가피하게 온생명 자체의 독립적 의식을 상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바로 이 점에서 온생명 자체의 중요성과 함께 이를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의 상대적 중요성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게 된다. (중략)

생명 가치의 판단 기준

낱생명들이 지닌 가치를 그들 자체만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또한 온생명이란 그 어떤 절대자를 위한 종속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고 할 때 온생명에 비추어 낱생명들이 지닌 상대적 가치를 논의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조심스런 일이 된다. 그러나 일을 손쉽게 시작하기 위하여 하나의 간단한 유비로서 한 유기체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예컨대, 인체를 비롯한 한 유기체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세포들의 상대적 가치는 이들이 유기체의 정상적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 좋은 기준으로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온생명의 경우에도 각 낱생명들의 온생명의 ‘건강한’ 전체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의 건강한 존재 양상, 더 나아가 이것의 이상적인 존재 양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한 각 낱생명들의 기여도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하나의 좋은 상대적 가치 척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온생명에 어떤 이상적인 존재 양상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선험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과학 또는 인간의 이지적 노력에 의해 그 해답을 쉽게 추구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그 어떤 최선의 추정을 시도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를 위해서는 이것에 관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이 요청될 것이다. 특히 온생명의 역사적 성장 과정과 온생명의 생태적 존재 양상 등에 관한 지식들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온생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지향해야 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온생명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생명 현상들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을 비롯한 영특한 지적 존재들을 빚어내어 그들을 통한 또 하나의 창조 작업을 이루어나가는 실로 경탄해 마지않을 그 어떤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본다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 양상이란 최소한 이러한 창조적 다양성을 지속시켜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가 만일 온생명의 병적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창조적 기능과 성과를 그 어떤 이유로 인해 상실하거나 상실해버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규정은 물론 온생명의 어느 한 부분인 인간이 보는 관점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제약 아래 얻어지는 관점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바로 온생명 안에서 사고와 판단의 능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이것이 곧 온생명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여기서의 인간은 온생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자기중심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과 자신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상황적 제약을 어느 정도 보완해줄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물리학을 통해 중요한 한 유비를 찾아볼 수 있다. 물리학에서 자연을 서술하는 관점 또한 특정 관측자가 특정한 기준계를 설정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 제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제약을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넘어서는 데 성공한다. 이른바 좌표 변환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인데, 자연의 기본 법칙들은 모두 이 기준 좌표계 설정 방식과 무관하다는 원리를 전제하고 이 원리에 입각하여 좌표 변환의 방식을 마련함으로써 어느 관측자의 입장에서 보나 대등한 결과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지닌 핵심적 내용인데, 이러한 정신에 맞는 이론적 구도를 생명 가치의 경우에도 마련해낼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가치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구성한다는 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인간의 입장에서 온생명의 한 이상적 모습을 찾아냈다고 할 때, 여타 동식물의 입장에서 본 온생명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 있는 변환 이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낱생명들이 지닌 가치의 경중을 온생명의 이러한 이상적 존재 양상과 관련하여 설정해볼 수 있다. 이들 모든 낱생명들이 그 자체로서 본원적 가치의 일부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현실적으로 온생명의 존재 양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여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에 역행하는 기능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어떤 고등 동물 또는 식물에 대해 질병만을 초래할 뿐 다른 어떤 긍정적 기여도 하지 않는 박테리아 종이 있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낱생명으로서 생명으로의 본원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나 오히려 이를 퇴치하는 것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 양상에 부합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나, 최소한 하나의 분명한 기준, 즉 온생명의 이상적 존재양상 속에서의 낱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기준이 설정되고, 이에 가장 적합한 가치판단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방향 제시는 가능해진 셈이다.

새로운 생명 가치관의 수용 문제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설혹 우리가 합리적 차원에서 이러한 논의의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우리 내부의 깊은 공감과 함께 심정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객관적 당위성이 충분히 인정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심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거나, 이에 대해 아무런 실천적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가치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능 속에 각인된 욕구와 이에 바탕을 둔 감성, 그리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의식해낸 의식의 내용이 서로 간에 자연스럽게 부합될 때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그 어떤 당위의 근거를 지닌 사안이라 하더라도 이미 의식 내면에 각인된 이러한 선천적 바탕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를 내면화하여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논의한 온생명 중심의 생명 가치는 어떠한 선천적 바탕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강한 생존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생존 유지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가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며, 이것 자체가 우리의 선천적 의지와 감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가치를 내면화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부모 자식 간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의 생존에 대해 거의 자신의 생존 의지에 버금가는 강한 보존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물론 사람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으나 적지 않은 경우 가까운 이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애완동물을 비롯한 동식물들에게조차도 그 생존을 보살피려는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이것 또한 자신만의 생존에 대한 의지를 넘어서는 공생의 의지와 감성이 인간 내면 깊숙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셋째 흔히 스포츠 애호가들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극히 우연한 인연으로나마 어느 한 부류를 자신이 속하는, 혹은 자신과 관련이 되는 부류라고 보게 되는 일종의 연대 의식을 지닐 수 있으며, 일단 이러한 의식에 도달하면 이의 안위를 자신에 대한 안위와 일체화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특정 부류와의 이러한 일체화 경향이 자신과의 관련성에 대한 매우 피상적이고 인위적인 연결 고리만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한 프로야구 팀의 열렬한 팬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팀과 어떤 실질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실상 합리적 사고의 판단을 넘어서는 그 어떤 내면적 감성의 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만일 위의 세 가지 성향을 우리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선천적 특질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합리적 사고에 의해 온생명에 대한 그 어떤 객관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선천적 특질을 바탕으로 하여 이 인식의 내용을 우리의 의지와 감성 속에 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한편으로 친족과 이웃 그리고 인근 동식물에 대한 애호의 심정을 확장시켜나감과 동시에 자신과 온생명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선천적으로 주어진 연대 의식의 작용을 통해 온생명과의 일체화 의식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작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좀 더 큰 ‘나’, 곧 온생명으로의 ‘나’에까지 이를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나와의 일체성을 말해줄 논거가 분명하다면 분명할수록 큰 ‘나’로의 일체감은 더욱 확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러한 보다 큰 ‘나’에 이르게 되면 다시 자신에 대한 생존 의지, 즉 자신이 내면에 간직한 본연적 가치를 통해 온생명 중심의 가치관을 단순한 지적 인식의 기준이 아닌 의지적, 감성적 수준으로까지 내면화함으로써 이를 결과적으로 주체적 의지 속에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상 이러한 성향은 온생명 안에서 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얻어진 개체 보존 성향과 생태 보존 성향 그리고 동류 개체간의 협동을 통한 상위 개체 형성 성향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직 인간에게서는 그의 지적 이해력에 힘입어 최상위의 생명 단위, 즉 온생명까지 이를 확대함으로써 위에 제시한 온생명 중심의 가치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온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도움 없이 그 어떤 깊은 직관에 의해 이미 이러한 가치관에 도달한 선례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양의 성현들이 이룩한 깨달음과 가르침에는 이러한 가치관의 내용들이 적지 않게 함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전수해온 심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설혹 현대와 같은 과학적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해지는 가르침의 합리적인 내용이 그들의 의지와 감성에 깊은 공명을 일으킬 때 이는 이들의 내적 확신과 의지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기존 사상과의 연관성

온생명 중심의 생명 가치관은 기존의 여러 생명 가치관과 큰 차이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전통 사상 속에는 모종의 직관에 의해 이것의 핵심적 내용을 파악하고 이를 전수해온 사례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이러한 전통 사상들을 온생명적 관점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전통 사상의 주요 내용을 재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 가치관을 기존의 문화적 전통과 발전적으로 융합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가치관들이 우리의 문화 속에 하나의 가치로 정착되기까지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이 이유들이야말로 우리가 이제 이해하고 활용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특히 오늘의 관점과 비교하여 이들이 어떠한 점에서 불완전하며 또 어떠한 점에서 개선의 여지를 지니는지를 함께 살펴 나간다면 이러한 귀중한 전통을 오늘의 문화 속에 되살려내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굳이 가치관의 근원적 전환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고심할 것이 아니라 기존 가치관의 보완이라고 하는 훨씬 용이한 과제로 이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먼저 온생명 중심 가치관을 동양적 가치관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친화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동양적 사고 그 자체가 온생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삶의 방식에 그 초점을 맞추어온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서구적 사고, 특히 서구 과학적 사고와는 달리 이를 면밀한 사실 추구와 정교한 법칙적 연관 속에서 재구성해낸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그 어떤 직관적 인식을 통해 이루어냄으로써 그 의미의 선명성과 논의의 치밀성에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흔히 천지(天地)라는 말로 개념화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하늘과 땅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붙이들이 삶을 이루어나가게 되는 ‘삶의 장’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 천지 안에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각종 기(氣)가 순환되면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이 기를 받아 그 어떤 질서, 즉 이(理)에 따른 삶을 영위해가는 것이다. 이때 태극(太極) 또는 태극의 리(理)로 대표되는 그 어떤 전체적 가치 아래 각각의 물(物), 즉 개체들은 그 각각 품수받은 특정한 위상에 따라 이를 나누어 함유하게 되는 것이다. 즉, 동양의 가치 체제는 한마디로 리일분수(理一分殊)라 하여 동일한 보편적 가치와 위상에 따라 이를 나누어 지니는 개별적 존재 가치의 체제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물론 생태계라든가 온생명에 해당하는 구체적 체계에 대한 명시적 개념을 설정하지는 않고 있으나 적어도 그 기능적 측면에 관한 한 상당한 직관에 도달했으며 자신들 나름의 개념 체계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도 사상 또한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 모든 생명붙이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이를 자비라는 심성을 통해 내면화하고 있다. 특히 인도 사상의 브라흐마(Brãhma, 梵) 속에는 온생명과 유사한 개념이 짙게 깔려 있으며 이를 하나의 커다란 그물망으로 이해하는 화엄 사상은 온생명의 생태적 성격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동북아시아 사상으로 승화시킨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이에 바탕을 둔 여러 해석에서 낱생명과 온생명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직관을 읽을 수 있다.

동양사상들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은 물론 다분히 임의적인 것이며 동양 사상의 본령을 짚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온생명 중심적 생명 사상과의 공통점을 짚어내려고 하는 것이며 동양 사상 그 자체에 대한 원형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 사상은 온생명적 시각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측면을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해석해내어야 할 것인가는 여기서의 논의와 직결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적 측면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만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러한 관심사는 파울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하는 종교적 특성, 즉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삶 그 자체에 대한 궁극적 정향을 지니기 위해서는 온생명을 다시 넘어서는 또는 온생명의 목적을 말해줄 그 어떤 정향을 지녀야 할 것이며 이는 여전히 남겨진 문제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온생명 개념과 이러한 궁극적 관심사를 구분 없이 일체화하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다. 온생명이 아무리 크고 존귀하다 하더라도 이는 한정된 하나의 자족적 생명일 뿐이며 무제한의 위력을 가지거나 무한히 확대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이 무제한의 존속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나 이는 곧 사멸하거나 치명적 위해를 입을 수도 있는 매우 섬약한 존재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멸 또는 위해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무궁한 능력을 지닌 신적인 존재로 보아 이를 섬긴다든가 이에 기탁하여 그 어떤 안위를 희구하는 일은 온생명 개념과는 배치되는 일일 뿐 아니라 온생명의 안위를 보살피기 위해서도 오히려 위험스런 상황일 수 있다.

이러한 동양적 관점에 견주어볼 때 서구적 사상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우선 서구에서는 우리 삶의 터전인 우주를 직접적인 삶의 장 또는 생명의 체계로 보는 대신에 정신과 물질의 이분화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를 위주로 하는 정신의 세계와 물질적 질서, 특히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로 구분하여 그 각각에 대한 독자적 이해 추구를 시도해왔다. 이는 물론 물질과 정신의 분리, 사실과 가치의 분리 등을 통해 세계를 파편화시켜 보는 문제를 낳기도 하였으나 궁극적으로 물질세계에 대한 정교한 합법칙적 이해에 성공함으로써 이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론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과학적 이해의 진전에 따라 물질과 정신의 관계가 다시 강구되고 있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윤리적 강령들이 다시 자연의 세계에까지 확대됨으로써 새로운 방향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절대자로서의 신 사이에 이루어진 삼자 관계가 온생명 내에서의 인간, 그리고 온생명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신과 맺게 될 관계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과제가 남았다고 말할 수 있다.

– 『삶과 온생명』, 현암사(201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