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하다.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단식을 시작하고, 이튿날엔 종신토록 부부간의 성생활을 끊겠다는 뜻의 解婚을 선언하다. 12월 5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절감하고 '눅임의 기쁨'(一日氣溫感)을 작시하여 성서조선 156호(1942년 1월호, 12쪽)에 기고하다.
1942년(52세) 1월 4일 重生日, 入敎(1905년)한지 38년만에 하나님과 예수를 깊이 체득하고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 (성서조선 157호, 1942년 2월호, 33-38쪽),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성서조선 158호 1942년 3월호, 57-61쪽)를 기고하다. 성서조선사건으로 4-5월 57일 동안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다.
1955년(65세)
일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하다. 1955년 4월 26일부터 일기(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974년 10월 3일까지 계속하다. 김흥호는 속기사를 시켜 다석의 1956-57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기록케 하다
1959년(69세)
노자(老子 늙은이)를 우리말로 완역하다.
1960년(70세)
주규식이 1960-61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받아쓰다.
1965년(75세)
강원도 평창군 방림에서 농사하는 차남 자상(自相)을 자주 찾아가다.
1977년(87세)
톨스토이마냥 객사할 요량으로 6월 21일 가출했다가 23일 밤중에 순경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오다. 그 다음부터는 거의 말을 하지 않다.
1980년(90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7월 31일 부인 김효정여사 88세로 별세.
1981년(91세)
2월 3일 구기동 집에서 돌아가다. 날수로 33.200일을 살다.
2월 5일 벽제 공원묘지의 부인곁에 묻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