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정신치료 기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빅터 프랭클의 위대한 기록이다. 유대인으로서 정신의학자였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잃고, 그 역시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 참혹한 고통과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경험한다. 그는 온갖 비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추악한 모습뿐 아니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통찰한다.

「제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는 강제수용소에서 직접 겪은 일을 객관적이면서도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에서는 이 경험을 토대로 정립한 로고테라피를 소개하고, 저자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겪은 여러 예시를 통해 실생활에 어떤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에서는 로고테라피 이론의 핵심을 보충 설명하며, 인간의 의지와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희생과 시련,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가 정립한 로고테라피 기법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코로나 상황이 계속되는 이 시대에 빅터 프랭클이 제시하는 삶의 의미 찾기는 깊이 되새겨볼 만하다. 아래에 1부와 2부의 내용 일부를 발췌했다.


  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빅터 프랭클은 1945년에 처음 이 책을 쓸 때 ‘어떤 상황에서도(심지어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집필했다고 1984년 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할 책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 책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개인적인 체험, 즉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에 관한 기록이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들려주는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이야기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들어 왔던[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들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 대부분은 규모가 큰 수용소나 이름 있는 수용소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량학살이 실제로 자행됐던 소규모 수용소에서 일어났다. 또한, 이 이야기는 위대한 영웅이나 순교자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며 관리인 행세를 하며 특권을 누렸던 카포[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협조한 유대인 수감자. 이들은 수감자 신분이었지만, 나치가 포로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식사나 잠자리 등 다른 포로들보다 좀 더 나은 처우를 받았다.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을 굶기거나 구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이들은 독일군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 수감자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유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카포는 유대인이나 폴란드인, 러시아인, 혹은 당시 독일 법을 위배한 독일인들까지, 수감자 중에서 다양한 이들이 선발됐다. – 편집자 주]들이나 유명한 수감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저명인사의 시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기록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시련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소매에 신분을 구별해 주는 특별한 표시조차 달지 못한 채 카포들의 멸시를 받았던 보통 수감자들의 이야기다.[25~26쪽] (중략)

강제수용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글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비록 실제 일어난 일이더라도 그것이 한 개인의 체험과 관련된 경우에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런 체험의 명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29쪽] (중략)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는 수용소에서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눠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다.[120~121쪽] (중략)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이 자기 삶에 더욱더 깊은 의미를 부여할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그 자신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기회와 만나게 된다.[122~123쪽] (중략)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129~130쪽] (중략)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신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들을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힘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 목표 – 를 얘기해 줘야 한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뤄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137쪽] (중략)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138쪽] (중략)

만약 누군가 시련을 겪는 게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다.[139쪽] (중략)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140쪽] (중략)

수용소에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얘기를 했었다. 세상에 나가도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시련을 보상해 줄 만한 속세의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과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환멸 현상은 극복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이며, 나 같은 정신과 의사도 도와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중략)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161쪽]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이 장은 1962년에 출판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에 처음 실린 후, 계속 보완·수정됐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혹은 쾌락을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해지려는 욕구’로 불리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이차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해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가 있게 된다.[167~168쪽] (중략) 인간은 그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다.[169쪽] (중략)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175~176쪽] (중략)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181쪽] (중략)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Shena Yisrael)[‘이스라엘아, 들어라!’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의 첫 구절이다.]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215쪽] (후략)